2006년 5월 15일 월요일

"투쟁과 성공, 그리고 끝없는 도전"

"투쟁과 성공, 그리고 끝없는 도전"


탤런트 전원주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게 어릴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때부터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때도 뿌리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하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악착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만들어서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줄께"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을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쥬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쳐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

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쥬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도 남자같고.

성격도 화끈 털털했던 반면,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목소리도 여자같았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놓았던 오끗짜리나 열끗짜리 몇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의 순서도 큰 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학 출신이라고 하면 목젖이 보이게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

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곱게 말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바로'험한 얘기가 튀어나온다. 그걸 애들이 배우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만

자녀에게는 산 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흐지부지 목적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여러분들의 계약활동하고 똑같지 않느냐.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 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가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는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 명이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을동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원주 =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 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날락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 를 켜면 안 나올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2초면 사라진다.."등으로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 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것

둘 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 째. 합창의 원리이다.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 째.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

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 중얼..."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 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간

10년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 마, 귀신 나올 것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때를 기다려, 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터져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다가 언쟁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계시다가 당뇨 - 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때 김인문씨(극중 내 남편역)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루어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헌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는 "이것이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도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여러분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시원한

웃음과 노래가 제격이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2번, 녹화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보인다. 얼굴이 이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이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

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 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6남매 하버드·예일대에 보낸 전혜성씨

6남매 하버드·예일대에 보낸 전혜성씨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25&article_id=0000606665



[중앙일보 기선민.김성룡]


여 섯 남매를 모두 예일대.하버드대 등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다. 네 아들 중 두 명은 미국에서 고위 공직에 올랐다. 그 어머니가 자식 교육의 경험을 정리한 책이 발간 사흘 만에 3쇄를 찍었다. 애들 교육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한국 엄마들이 앞다퉈 책을 샀을 것이다. 그런데 '영재교육법'이나 '내 아이 미국 명문대 보내는 비결'쯤을 기대한 엄마들은 다소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이 어머니가 책 첫머리부터 "내가 자식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명문대를 나왔거나 고위직에 오르는 세속적 성공을 거둬서가 아니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으로 컸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내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도 잘 키워야 내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어머니의 이름은 전혜성(77).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내고 현재 예일대 로스쿨 학장으로 재직 중인 고홍주(52.해럴드 고)씨의 어머니로 잘 알려져 있다. 저서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출간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그를 지난달 28일 만났다. 자그마한 체구와 조용조용한 목소리는 여느 할머니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일단 말문을 열자 당당하고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 성공을 거둔 비결이 궁금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항상 남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일렀습니다. 부모한테 섬김을 받는 아이, 자신을 섬기는 아이, 그래서 남을 섬길 줄 아는 아이가 진정한 리더로 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심으로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혼자 공부하지 말고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같이 해라'고 말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집이 비좁은데도 아이들 친구용 책상까지 들여놔 책상이 18개나 될 정도였어요."

-그렇게 가르치다 보니 저절로 잘 되더라는 말씀이신가요.
" 남들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일단 어느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목적의식을 세워 줬더니 엄마가 악쓰지 않아도 아이들이 이를 악물고 공부하더군요. 대신 두 가지 원칙을 세웠지요. '아침 식사는 꼭 한 밥상에서 한다, 저녁에는 다 같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한다'였지요. '공부해라' 대신 '공부하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 한국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의 사교육 스케줄을 치밀하게 관리하는 이른바 '매니저형 엄마'가 유능한 엄마의 전형처럼 여겨집니다. 아내와 자녀를 외국에 유학 보내고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도 많고요.
"한국 엄마들은 우리 아이가 경쟁 대열에서 낙오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이 심하지요. 그러다 보니 교육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게 됩니다. '기러기 아빠'를 보면 저렇게 아빠가 아이와 떨어지면서까지 가르쳐야 하는 게 무엇인가 싶어요. 아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부모 자신의 만족 아닐까요. 그런 이들에게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요. 교육의 목적은 자립입니다. 저희 아이들은 어렸을 때 신문 배달을 해 용돈을 벌었습니다. 셋째 아들 홍주가 예일대 로스쿨 학장이 됐을 때 지역신문(뉴 헤이븐 레지스터) 헤드라인이 '우리 신문을 배달하던 소년이 예일대 학장이 됐다'였어요."

-스스로도 육 남매를 키우면서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으셨는데요.
" 쉽지는 않았지요. 저희 남편이 타지 생활을 오래 하니 외로우니까 자식 욕심이 많았어요. 전화번호부 한 페이지를 고씨 집안 자식들로 채우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깐요. 오죽하면 막내를 낳고는 제가 '더 이상 낳게 하면 이혼할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놨겠습니까(웃음). 애를 업고 서서 타자를 칠 때도 있었어요. 애들이 잠들면 그때부터가 제 공부 시간이었지요. 고학생 부부니 보모 쓸 여유도 없었어요."

-형제들이 워낙 뛰어나니 그중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도 있지 않았을까요.
"막내 정주가 고등학교(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연설을 했는데 제목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아, 얘가 내색은 안 했어도 형과 누나들이 워낙 뛰어나니 스트레스가 심했구나' 실감했지요. 학교에서는 '고씨 왕가(Koh Dynasty)의 막내가 왔다'고 하면서 잘하면 당연히 여기고, 못하면 비교했으니 왜 안 그랬겠어요. 그런데 저희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난 게 아니에요. 다들 무지무지한 노력파, 워커홀릭(일 중독)이에요. 특히 홍주는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치열하게 노력하지요. 지금도 오전 4, 5시에 e-메일을 보내면 즉시 답장이 오곤 합니다."

-고홍주씨 얘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홍주는 배려심이 참 깊어요. 인권담당 차관보 시절 전 세계 43개국 이상을 돌았는데 그때마다 숄.앞치마.머그잔 등 사소한 것이지만 꼭 선물을 사왔어요. 국무부를 떠날 적에는 직원 70여 명에게 일일이 손으로 편지를 썼어요. 예일대 로스쿨 학장이 되고 나서는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한 백인 여성이 '30여 년간 예일대에서 일했지만 학장한테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고 감동하더래요."

-자녀들에게 한국에 대한 의식은 어떻게 심어 주셨나요.
" 아이들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 부모가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니 대단한 나라인가 보다'라며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하더라고요. 이름을 표기할 적에도 '해럴드 홍주 고' '하워드 경주 고' 이런 식으로 미들 네임(middle name.가운데 이름)을 꼭 쓰게 했고요."



-책에 소개된 '오센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이란 무엇인가요.
"' 오센틱 리더십'이란 우리말로 하면 '진정한' 또는 '유니크한(독특한)' 리더십이지요. 표 참조 진정한 리더십은 자신을 섬기고 남을 섬기고 세상에 봉사하는 리더십입니다. 또 그런 리더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고요."

-일주일 뒤면 어버이날인데 어버이날에 얽힌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어요. 제가 자고 있는데 침대에서 아침을 먹으라고 상을 차려 왔어요. 엄마가 한번도 앉아서 밥을 먹는 걸 못 봐서 어버이날이라도 좀 호강하라고 그랬대요. 어린것들이 어찌 저런 마음을 먹었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지요."

글=기선민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murphy@joongang.co.kr

*** '고 패밀리'는 2대 걸쳐 미국 박사학위 11개 따
' 고씨 가족(Koh Family)'의 가장 고 고광림 박사는 생전 "개인이나 국가나 위대한 성취는 한 세대에 이뤄지기 어렵다. 몇 세대, 수십 대를 두고 공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도 출신인 고 박사는 경성제국대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서 영어와 법률사상사를 강의했고 1949년 미국에 건너가 럿거스대 등 3개 대학에서 정치학.법학 등으로 박사학위를 3개나 받은 수재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유색인종이라 하더라도 실력만 있으면 차별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며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 공들인 결과물이 오늘의 6남매다. 고씨 가족이 받은 박사 학위는 모두 11개에 달한다. 장녀 경신씨는 하버드대를 나와 MIT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재 중앙대 화학과 교수로 일한다. 예일대 의대를 나온 장남 경주씨는 매사추세츠주 보건후생부 장관을 지냈고 하버드대 공공보건대학원 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하버드대를 나온 차남 동주씨는 하버드대와 MIT에서 의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로스쿨 박사 출신의 3남 홍주(해럴드 고)씨는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법대 석좌교수가 됐다. 차녀 경은씨는 하버드 법대를 나와 컬럼비아 법대 부교수를 거쳐 예일대 법대 석좌교수로 일한다. 예일대에서 남매가 석좌교수가 된 것은 사상 최초였다. 하버드대 사회학과를 나온 막내 정주씨는 전공을 미술로 바꿔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기선민 기자

*** 전혜성씨는
1929 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영문과 2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가 디킨슨대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장면 정부에서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와 유엔 대표를 지낸 고 고광림 박사와 고학생 시절 만나 결혼한 뒤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사회학.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국립 민족학박물관과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객원 교수를 지내며 한국학과 한국 문화 알리기에 주력했고, 예일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부장 등을 역임했다. 52년 남편과 공동 설립한 한국연구소를 계승한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서 현재까지 한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양성에 힘쓰고 있다. 고 전항섭 유한양행 사장이 아버지다. 저서로는 96년 낸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가 있다. 2004년 한인이민100주년준비위원회의 '지난 100년간 미국에 가장 공헌한 한인 100인'에 남편, 장남 경주씨, 3남 홍주씨와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노 년
노 년

시몬느 드 보부아르 ( 프랑스, 작가 )


붓 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 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 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붓다는 한 노인을 통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난 붓다는 인간 조건 전부를 걸머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인간 조건 중에서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들은 피한다. 그 중 '늙음'이라는 것은 유난히도 멀리한다. 미국 사람들은 '사망한'이라는 단어를 말소해 버렸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가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노년에 관계되는 모든 말들을 회피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도 역시 '늙음'은 금지된 주제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노년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인정은, 늙음이 모든 여자들을 복병처럼 노리고 있으며, 이미 많은 여자들이 늙음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친절하게 혹은 몹시 화를 내면서 내게 똑같은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노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일종의 수치스런 비밀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성이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분야에는 풍부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반면 전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노년에 관련된 것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만화 작가는 등장 인물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한 쌍을 집어 넣었다가 만화 한 편을 온통 뜯어 고쳐 다시 그려야 했다고 한다. '노인들을 삭제해 버리시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내가 노년에 관한 수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 하지만 당신은 늙지 않으셨는데요!...... 어찌 그런 서글픈 주제를......."


내 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Marcuse)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 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프랑스는 노인의 인구 분포율이 세계 최고―전체 인구의 12%가 65세 이상 ―이다. 그런데 그들 노인들은 가난과 고독, 불구, 그리고 절망의 형을 언도받았다. 미국 노인들의 운명이라고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자기들이 표방하는 휴머니즘과 노인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를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인들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편리한 결정을 취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면,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 나가는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노인들에 대하여 사회가 취하는 태도는 하나같이 모두 이중적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어떤 분명한 연령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사춘기의 위기는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해준다. 18세에서 21세의 젊은이들은 성인 세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지위 향상에는 거의 언제나 '통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지위의 확립을 기리는 '통과 의식'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법상으로는 백 살 먹은 사람과 사십 대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법률가들은 질병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져야 할 형법상의 책임은 젊은이와 똑같다고 간주한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은 노인들을 별개의 범주로 치지 않는다. 게다가 노인들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출판물, 영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는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층을 겨냥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노년기 연령층을 위한 것들은 없다.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잘것 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편리한 환상이다. 경제학자들이나 입법 의회 의원들은 경제 활동 인구에게 비경제 활동 인구는 하나의 짐이며, 그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그때 그들은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편리한 환상이 옳다는 것을 믿게 하는 셈이다. 현재 경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바로 미래의 비경제 활동 인간이 아닌가. 또한 그들은 현재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미래를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조합원들은 그 점을 올바르게 보고 있다. 그들이 요구 사항을 제시할 때, 퇴직 문제에 항상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노인들은 그들의 권리를 부각시킬 수단이 없다. 착취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과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 관계를 끊어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변호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산층의 사고 방식이 유포시킨 신화들과 상투적인 말들은 노인을 '타인'으로 보여 주려고 애쓴다.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라고 프루스트는 지적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들 자신의 승화된 이미지, 그것은 백발의 후광에 싸인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 조건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 보는 현자이다. 노인들이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그들은 형편없는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하여 첫번째 이미지에 대립되는 이미지가 부여된다. 그것은 노망이 들어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해서 어린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실성한 노인이다. 여하튼 미덕에 의해서건 혹은 타락에 의해서건, 노인들은 인간이라는 범주 밖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하다고 판단되는 최소한의 것조차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절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인 추방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 결국에는 그것이 우리들 자신을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모든 현실 중에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현실은 아마 노년기일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평가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큰 변화를 앞당겨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늙는다는 것보다 더 자명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보다 더 예상 외인 것도 없다.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하여 물으면 젊은이들, 특히 젊은 처녀들은 자신의 인생을 제일 길게 잡아봐야 60세로 제한한다. "그 나이까지는 안 갈 거예요. 난 그 전에 죽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난 그전에 자살하겠어요"라고까지 한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절대로 늙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종종 퇴직의 순간이 오면 갑자기 망연자실해 하는 노동자도 있다. 퇴직 날짜는 미리 정해져 있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것에 대비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사실 철저하게 정치화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것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보다 앞서 이미 그 날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보통 죽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긴 시간을 앞서서 거리를 두고 가장 명철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늙는다는 현실이다. 노년기란 우리의 직접적인 가능성들 중의 일부이며, 어느 나이에고 노년은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때 노년과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종종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 순간 늙은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젊거나 혹은 한창 나이일 때 우리는 붓다처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노년기를 갈라 놓고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영원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머나먼 미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죽은 사람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죽음이라는 무(無) 앞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무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니까.' 죽음이라는 소멸 속에 나는 나의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20세, 40세에 노파가 된 나를 생각해 본다는 것, 그것은 '타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신체적인 변화 속에는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언젠가 어른으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심지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자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린 시절에는 보통 어른이라는 지위가 가져다 주는 막대한 이점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마치 불명예처럼 느껴진다. 건강을 잘 간직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늙음이 가져 오는 신체적인 노쇠는 금방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종은 살아온 햇수에 따른 변화가, 구경거리가 될 만큼 가장 두드러지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옆구리가 홀쭉해지고 쇠약해져도 모습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변한다. 우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옆에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미래의 얼굴과도 같은 그 여인의 어머니를 볼 때 가슴이 메인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보고에 의하면 남비크와라 인디언들은 '젊고 아름답다'를 뜻하는 단어가 단 한 개밖에 없으며, 또 '늙고 추하다'는 뜻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로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의 모습 앞에서도 미심쩍어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어떤 목소리가 마음 속에서 속삭인다. 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그건 내가 아니야라고. 늙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 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는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 모두를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 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 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과 같다. 그러나 일종의 평등성이 지배하는 집단 안에서 ―농촌 사회 안에서나, 또 몇몇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 중년에 접어든 사람은 그 자신이 스스로 알고 싶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가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그의 내일의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농촌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한 농부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 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나무 판대기들을 짜 맞추고 있는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를 위해 만드는 거야." 그날로 할아버지는 가족 식탁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게 된다. 집단 사회의 구성원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 이익과 눈앞의 이익 사이의 타협점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절박한 필요성에 처할 때 어떤 원시인들은 할 수 없이 연로한 그들의 부모를 죽인다. 그들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그보다 덜 극단적인 경우에는 앞을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부모자식 간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기주의를 완화시킨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는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 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 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기계의 수명이 아주 짧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도 너무 오랫동안 쓰여져서는 안 된다. 55세를 넘은 모든 인간은 폐물 처리해 버려야 한다"라고 최근 어느 학술 연구회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류학자 리치 박사는 말했다. '폐물'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퇴직 생활이란 자유와 여가의 시간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여 예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치 없는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역으로 살펴보자. 극빈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여가 시간이 많다고 해서 퇴직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마침내 여러 가지 구속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는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긴다. 그저 쓰레기 신세가 된 그는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혹은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체들로 볼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 온 과거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이런 자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을 메이게 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절단해 버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를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 동요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의 운명의 개선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성공한다. 카스트 제도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간디(Gandhi)는 천민인 패리어들의 인간 조건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또한 봉건 가족제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중국은 여자를 해방시키지 않았던가.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단지 제한적인 몇몇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에 국한된 문화의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붙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노년, 1968 >

2006년 5월 1일 월요일

내가 만일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제가 잘 가는 싸이트에 어느분이 올리신 것입니다. 펜글씨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보시더니 이것을 써주셨다고 하는군요. 글씨도 좋지만, 내용은 더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