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10일 수요일

노 년

시몬느 드 보부아르 ( 프랑스, 작가 )


붓 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 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 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붓다는 한 노인을 통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난 붓다는 인간 조건 전부를 걸머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인간 조건 중에서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들은 피한다. 그 중 '늙음'이라는 것은 유난히도 멀리한다. 미국 사람들은 '사망한'이라는 단어를 말소해 버렸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가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노년에 관계되는 모든 말들을 회피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도 역시 '늙음'은 금지된 주제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노년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인정은, 늙음이 모든 여자들을 복병처럼 노리고 있으며, 이미 많은 여자들이 늙음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친절하게 혹은 몹시 화를 내면서 내게 똑같은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노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보다 젊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일종의 수치스런 비밀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성이나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분야에는 풍부한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반면 전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노년에 관련된 것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만화 작가는 등장 인물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한 쌍을 집어 넣었다가 만화 한 편을 온통 뜯어 고쳐 다시 그려야 했다고 한다. '노인들을 삭제해 버리시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내가 노년에 관한 수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 하지만 당신은 늙지 않으셨는데요!...... 어찌 그런 서글픈 주제를......."


내 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Marcuse)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 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프랑스는 노인의 인구 분포율이 세계 최고―전체 인구의 12%가 65세 이상 ―이다. 그런데 그들 노인들은 가난과 고독, 불구, 그리고 절망의 형을 언도받았다. 미국 노인들의 운명이라고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자기들이 표방하는 휴머니즘과 노인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를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인들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편리한 결정을 취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면,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살아 나가는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나는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노인들에 대하여 사회가 취하는 태도는 하나같이 모두 이중적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을 어떤 분명한 연령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사춘기의 위기는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해준다. 18세에서 21세의 젊은이들은 성인 세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지위 향상에는 거의 언제나 '통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노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가 있다. 또한 이 새로운 지위의 확립을 기리는 '통과 의식'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법상으로는 백 살 먹은 사람과 사십 대 사람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법률가들은 질병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져야 할 형법상의 책임은 젊은이와 똑같다고 간주한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은 노인들을 별개의 범주로 치지 않는다. 게다가 노인들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출판물, 영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는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층을 겨냥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노년기 연령층을 위한 것들은 없다.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되는 보잘것 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편리한 환상이다. 경제학자들이나 입법 의회 의원들은 경제 활동 인구에게 비경제 활동 인구는 하나의 짐이며, 그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그때 그들은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편리한 환상이 옳다는 것을 믿게 하는 셈이다. 현재 경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바로 미래의 비경제 활동 인간이 아닌가. 또한 그들은 현재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미래를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조합원들은 그 점을 올바르게 보고 있다. 그들이 요구 사항을 제시할 때, 퇴직 문제에 항상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노인들은 그들의 권리를 부각시킬 수단이 없다. 착취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과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 관계를 끊어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변호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산층의 사고 방식이 유포시킨 신화들과 상투적인 말들은 노인을 '타인'으로 보여 주려고 애쓴다.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라고 프루스트는 지적했다.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른 체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들 자신의 승화된 이미지, 그것은 백발의 후광에 싸인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 조건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 보는 현자이다. 노인들이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그들은 형편없는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하여 첫번째 이미지에 대립되는 이미지가 부여된다. 그것은 노망이 들어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해서 어린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실성한 노인이다. 여하튼 미덕에 의해서건 혹은 타락에 의해서건, 노인들은 인간이라는 범주 밖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하다고 판단되는 최소한의 것조차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절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인 추방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 결국에는 그것이 우리들 자신을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모든 현실 중에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현실은 아마 노년기일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평가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큰 변화를 앞당겨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늙는다는 것보다 더 자명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보다 더 예상 외인 것도 없다.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하여 물으면 젊은이들, 특히 젊은 처녀들은 자신의 인생을 제일 길게 잡아봐야 60세로 제한한다. "그 나이까지는 안 갈 거예요. 난 그 전에 죽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난 그전에 자살하겠어요"라고까지 한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는 절대로 늙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종종 퇴직의 순간이 오면 갑자기 망연자실해 하는 노동자도 있다. 퇴직 날짜는 미리 정해져 있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것에 대비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사실 철저하게 정치화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것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보다 앞서 이미 그 날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보통 죽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긴 시간을 앞서서 거리를 두고 가장 명철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늙는다는 현실이다. 노년기란 우리의 직접적인 가능성들 중의 일부이며, 어느 나이에고 노년은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때 노년과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종종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 순간 늙은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젊거나 혹은 한창 나이일 때 우리는 붓다처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노년기를 갈라 놓고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영원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머나먼 미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죽은 사람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죽음이라는 무(無) 앞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무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니까.' 죽음이라는 소멸 속에 나는 나의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20세, 40세에 노파가 된 나를 생각해 본다는 것, 그것은 '타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신체적인 변화 속에는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언젠가 어른으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심지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히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자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자 하는 욕망은, 어린 시절에는 보통 어른이라는 지위가 가져다 주는 막대한 이점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마치 불명예처럼 느껴진다. 건강을 잘 간직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늙음이 가져 오는 신체적인 노쇠는 금방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종은 살아온 햇수에 따른 변화가, 구경거리가 될 만큼 가장 두드러지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옆구리가 홀쭉해지고 쇠약해져도 모습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변한다. 우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옆에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미래의 얼굴과도 같은 그 여인의 어머니를 볼 때 가슴이 메인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보고에 의하면 남비크와라 인디언들은 '젊고 아름답다'를 뜻하는 단어가 단 한 개밖에 없으며, 또 '늙고 추하다'는 뜻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리는 연로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의 모습 앞에서도 미심쩍어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어떤 목소리가 마음 속에서 속삭인다. 저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그건 내가 아니야라고. 늙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기 전에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 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는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 모두를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 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 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과 같다. 그러나 일종의 평등성이 지배하는 집단 안에서 ―농촌 사회 안에서나, 또 몇몇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 중년에 접어든 사람은 그 자신이 스스로 알고 싶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가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그의 내일의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농촌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한 농부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 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나무 판대기들을 짜 맞추고 있는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를 위해 만드는 거야." 그날로 할아버지는 가족 식탁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게 된다. 집단 사회의 구성원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 이익과 눈앞의 이익 사이의 타협점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절박한 필요성에 처할 때 어떤 원시인들은 할 수 없이 연로한 그들의 부모를 죽인다. 그들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그보다 덜 극단적인 경우에는 앞을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부모자식 간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기주의를 완화시킨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는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 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 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기계의 수명이 아주 짧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도 너무 오랫동안 쓰여져서는 안 된다. 55세를 넘은 모든 인간은 폐물 처리해 버려야 한다"라고 최근 어느 학술 연구회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류학자 리치 박사는 말했다. '폐물'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퇴직 생활이란 자유와 여가의 시간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여 예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치 없는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역으로 살펴보자. 극빈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여가 시간이 많다고 해서 퇴직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마침내 여러 가지 구속에서 해방되는 순간, 그는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긴다. 그저 쓰레기 신세가 된 그는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혹은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체들로 볼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 온 과거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이런 자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을 메이게 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절단해 버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를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 동요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의 운명의 개선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성공한다. 카스트 제도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간디(Gandhi)는 천민인 패리어들의 인간 조건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또한 봉건 가족제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중국은 여자를 해방시키지 않았던가. 인간은 그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는, 현상황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전복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단지 제한적인 몇몇 개혁을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에 국한된 문화의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붙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노년, 1968 >
Previous Post
Next Post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