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6일 월요일

"거실은 온 가족의 공간… TV만 볼 수 있나요"

"거실은 온 가족의 공간… TV만 볼 수 있나요"
온 가족이 '독서 고수' 된 홍양희씨네


서울 돈암동에 있는 홍양희(58)씨네 거실엔 책이 넘친다. 96년 이 아파트에 이사 올 때, 남편 권창준(62)씨가 거실 한 벽 가득 책장을 짜 넣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했다.

“거 실은 식구들이 다 모이는 공동생활 공간인데, 여길 TV와 장식장을 두는 장소로만 쓰는 건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족생활과 많이 다르다. TV는 아무리 많이 봐도 기억에 남거나 사고력을 키워주진 않더라. 상상하는 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활자에서 나온다.”

사실, 그 전에도 이 집 거실엔 책이 넘쳤다. 없던 책이 별안간 생긴 게 아니라, 서가의 크기가 한 벽을 메우도록 커졌을 뿐이다.
" 이 책, 너도 한 번 읽어볼래?" 시어머니 홍양희(맨 오른쪽)씨가 7일 서울 돈암동 자택 거실에서 며느리 김선영씨에게 책을 건네고 있다. 왼쪽부터 큰 아들 도훈씨, 며느리 김씨, 아버지 권창준씨, 막내딸 민정씨, 홍씨. /오종찬 객원기자


건 설회사 임원을 지내고 은퇴한 남편 권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아마추어 사진가다. 평생 종교 서적과 사진집을 늘 곁에 뒀다. 아내 홍씨는 호스피스 교육 등을 벌이는 시민단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회장이다. 이 집 거실에 있는 소설책, 철학책, 역사책 중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책은 십중팔구 홍씨 책이다.

부모와 함께 사는 큰아들 도훈(33·회사원)씨와 며느리 김선영(33·주부)씨 부부는 올 7월 태어날 첫 아이 때문에 흥분 상태다. 침대 머리맡에 백과사전 두께 태교 책을 예닐곱 권 쌓아 놓고 부부가 함께 읽는다. 며느리 김씨는 시어머니 홍씨에 버금가는 독서가다. 홍씨는 “우리 며느리는 2년 전 시집 올 때 180㎝ 높이 8단 책장 두 개에 책 수백 권을 꽉 채워서 지고 온 아이”라며 며느리 자랑을 했다.

막 내딸 민정(29·회사원)씨도 올케에 지지 않는 시누이다. 종목은 소설. 거실 서가는 물론, 자기 방에도 천장에 닿을 듯한 책장 두 개에 소설책이 꽉 찼다. 장차 결혼할 남자가 나타나면 그걸 다 지고 시집갈 계획이다. 분가해서 따로 사는 둘째아들 도현(31)씨 부부 집에도 책이 넘친다.

거실은 물론, 방과 부엌과 화장실에도 책이 넘친다. 이쯤 되면 이 가족에게 책은 취미를 넘어 습관이다. 특히 어머니 홍씨에게 책은 평생 ‘직업’이자 ‘소명’이기도 했다. 결혼 초 답십리 단독주택에 살 땐 어린 3남매를 키우느라 바빴다. 막내딸 민정씨를 초등학교에 보낸 다음, “아이들 키우면서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유럽엔 마을마다 작은 도서관이 있다던데!” 하고 무릎을 쳤다. 홍씨는 사서 자격증을 딴 다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3년 일하고, ‘작은 도서관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87년의 일이다.

▲[조선일보 창간 87주년 캠페인] 거실을 서재로 바꿈으로써 거실을 온 가족의 공간으로 만든 서울 돈암동 홍양희(58)씨 집을 찾아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 조선일보 오종찬 객원기자

그 뒤 답십리에서 잠원동으로, 잠원동에서 다시 돈암동으로 옮기는 동안, 홍씨는 이사 가는 동네마다 아파트 노인정과 동네 교회에 주민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때마다 집에 있는 좋은 책을 좍 뽑아서 내놨고, 지금 남은 게 이 정도”라고 했다.

아 버지 권씨는 “우리가 책을 사랑했을 뿐, 자식들에게 책 읽으라고 성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딸 민정씨는 “어려서부터 늘 거실에 책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책을 사오시면 오다 가다 읽게 됐다”며 “자연스럽게 책 읽는 일이 익숙하고 편안하고 즐거워졌다”고 했다. 그 순간 어머니 홍씨가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좋은 사람 있으면 우리 딸 소개 좀 시켜 주세요. 책 좋아하는 남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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