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독일의 무서운 젊은이들/임혜지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301322.html






나의 모교인 칼스루에 공대는 독일에서도 유일하게 건축과 전교생에게 집중적인 실측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다. 학생들은 소정의 예비교육을 받은 후, 1주일 동안 어느 경치 좋은 시골 동네에 가서 합숙하며 문화재 건물을 실측하는 실습을 한다. 가정에서 곱게 자란 대학 초년생들에게 이 훈련기간은 아마도 고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남녀 학생들 백여 명이 체육관 바닥에서 자며 부족한 화장실과 샤워실 앞에서 줄을 서는 것도 요즘 청소년들에겐 드문 경험이겠지만, 어둡고 더럽고 위험한 건물에서 작업하여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실측도면을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내는 일은 고난도의 노동이다. 실수를 통해 깨쳐가며, 자칫하면 일을 끝내지 못할 것이라는 강박감과도 싸우는 정신노동이기도 하다.

올해 내게 배정된 학생들은 우연히 전부 여학생들이었다. 유난히 학구열이 많고 실력이 뛰어난 그룹이었다. 처음에 나는 천재 여섯 명을 맡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배움의 속도가 빨랐고, 내가 힌트 하나만 줘도 자기네들끼리 의논해가며 줄줄이 깨쳤다. 모처럼 적수를 만난 나는 지극정성으로 가르쳤고, 학생들은 초보자의 도면이 아닌 전문가의 도면을 목표로 기염을 토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이들 모두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뛰어난 학생도 있었지만 유난히 행동이 굼뜨고 사고가 느린 학생도 있었고, 대부분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나는 보편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이 그룹의 실력이 특별히 뛰어난 이유가 궁금하여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선 개개인의 성품이 착하고 양보를 잘하는 점이 돋보였고, 친구들 간에도 예의가 바르고 서로 배려하는 점이 남달랐다. 그룹 안의 노동분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세력다툼이 없었고 평등했다.

수직관계에 있는 나에 대한 자세도 건전했다. 내게 공손했지만 나를 특별히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가르치는 일을 목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내 앞에서 무엇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들이 이해할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나를 우습게 보는 대신에 오히려 고무적으로 여겨 함께 머리를 짜서 해결책을 찾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평소에 빠릿빠릿하게 잘 따라오는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고, 평소에 이해가 좀 느린 학생들은 나와는 다른, 그러나 때로는 나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실력에 확신이 들자 나는 욕심을 내어 하나의 모험을 제안했다. '이 과목의 목적은 실측의 원리를 이해하고 협동작업을 연습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 목표를 100% 달성했고, 이대로 간다면 분명히 최고점수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자 분담한 일만 잘했을 뿐이어서 개인적으론 실측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히 남을 것이다. 초보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너희가 초보자의 단계를 좀 더 빨리 뛰어넘고 싶다면 분담된 역할을 바꿔가며 일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일의 속도가 떨어지고 실수가 늘어서 성적은 약간 떨어질지도 모른다. 너희가 여기에 온 이유가 전문가의 도면을 만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인지 생각해보고 결정하기 바란다.'

학생들은 당장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좀처럼 분담된 역할을 바꾸지 못했다. 이제 막 일을 배우는 초보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기대를 접었다. 그러나 내가 잠시 다른 곳에 다녀와서 보니 학생들은 어느새 각자 다른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고, 조금 있다가 또 분담을 바꾸는 것이었다. 기특해서 나중에 물어봤더니 이제 막 손에 익은 일을 놓고 다른 일을 하기가 너무 겁이 났는데 친구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떠밀어가며 일을 바꿨다고 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는 실수도 더 많이 생기고, 마지막엔 시간이 모자라서 밤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했지만 학생들은 끝까지 침착했고 화목했다. (나중에 평가회에서 학생들은 최고점수에서 조금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았으나 대단히 만족했고, 내게 특별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들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이런 젊은이들이 이끌어갈 독일의 미래를 상상했다. 평범한 재능을 특별한 실력으로 승화시키는 토양이야말로 독일의 경쟁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비결은 구성원들 사이의 인간적인 예의와 배려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왔더니 내가 만난 학생들보다 한 살 어린 우리 아들이 막 아비투어 시험(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교 입학시험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수능에 해당하는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한 과목 치는 데 대여섯 시간이나 걸려서 A4용지 이삼십 장씩 써내는 논술형 시험이었고, 며칠에 한 번씩 한 과목씩만 치렀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제 여동생이 싸주는 빵으로 점심을 때우며 무난히 잘 치렀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시험기간 중에도 짬짬이 학교의 졸업문집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쉬지 않고 공부만 해봤자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일을 해도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집에 모여서 같이 편집일을 하는 여학생 두 명도 우리 아들만큼이나 날라리들일 것이라고 난 무턱대고 믿어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험 전날에도 졸업문집을 만든다고 모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 저녁을 함께 먹으며 나는 여학생들에게 아비투어가 끝나면 무엇을 할 계획인지 물어봤다. 한 여학생이 자기는 그간 공부에 질렸기 때문에 일 년쯤 놀다가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지, 순 날나리로구나. 독일에선 공부를 못해도 학생자치회에서 인정 받으며 활동할 수 있느니 얼마나 좋아?

졸업식 날이 되었다. 독일에선 등수라는 건 없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겐 상으로 책을 주었다. (성적이 1부터 6까지 있는데 5와 6은 낙제점수이고 숫자가 적을 수록 성적이 좋다. 평균 1.8 이하면 상을 준다.) 90명 졸업생 중에 대략 10%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상을 받았는데, 시험 전날에도 공부 안 하고 졸업문집을 만든 날나리 학생 세 명이 모두 포함된 것이 내겐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진학을 미루겠다는 왕날나리 아가씨는 전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난독증에 아직도 구구단을 못 외우는 우리 아들이 고학년으로 가면서 성적이 나아지긴 했지만 상을 받으며 졸업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지난 학기 성적표를 깜빡 잊고 부모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우리 부부도 물어보는 걸 잊어버렸다.)

졸업식은 대형 홀을 빌려서 저녁을 먹으며 자유스럽게 진행되었다. 체육선생님이 사회를 보면서 마침 같은 시간에 치뤄지는 월드컵 결승전의 스코어를 간간이 알려주는 친절을 발휘했다. 학생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차례로 무대에 올라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성적표를 받았고, 여학생들은 양뺨에 교장선생님의 키쓰를 받았다. 부상으로 독일물리학회나 수학학회의 회원증과 함께 1년 회비를 면제 받는 학생들도 서넛이나 있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2년 과정은 전공을 정해서 공부했으므로 학생들은 과목별로 무대에 올라 전공 선생님과 함께 자유스럽게 지난 2년을 추억했다. 우스개소리도 많이 나왔지만 가슴이 뭉클한 장면도 많았다. 학생들이 선생님 앞에 단체로 엎드려 절을 하기도 했고, 어떤 선생님은 너희같은 학생들을 만나서 내가 많이 배웠노라고 학생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도 했다.

독일의 68학생운동은 무엇보다도 학교의 개혁을 가져왔다. 구세대의 저항도 만만찮았지만, 변화의 필요성이 사회전반에 공감되고 일단 개혁의 시동이 걸리자 학교는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구태의연했던 학교시스템은 시대에 맞도록 개편되었고 권위적이던 학교 분위기도 민주적으로 바뀌어갔다. 학생 자치회와 학부모 평의회가 결성되어 학교측에 대항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는 한편 삼각의 새로운 공조체제를 열었다. 70년대 중반에 독일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개혁이 자리잡는 과정을 직접 체험했던 나는 30년이 지난 오늘날 아들의 졸업식에 참여해서 그 결과를 보았다.
학생들은 학창생활을 빛내준 몇몇 친구들을 거명하며 특별히 감사를 표시했다. 그 이유가 전부 희생적인 봉사와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착함 등등, 경쟁사회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졸업문집을 보니 각 학생들에 대한 단상이 친구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남을 돕고 배려하는 성격이 학생들 간에 가장 높이 평가되고 가장 자주 쓰이는 칭찬, 즉 덕목 1호라는 점이 내겐 참으로 신선했다. (개인적인 경험이라 독일 전반으로 보편화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학생자치회장의 연설이었다. '너희는 암만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나중에 일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행여 일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곧 실직할 것이다.'라는 세뇌 속에서 자기네들은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넉넉하고 안정된 분위기에선 아이들도 저렇게 착하게 크는구나 싶었던 나는 그제서야 시대를 되돌아봤다. 통독 이후의 지긋지긋한 경제적 침체와 불안 속에서 자라난 세대가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학교의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챙기면서도 전과목 만점의 성적을 받아 대학입학과 동시에 세계 굴지의 회사에 고액의 연봉으로 스카웃된 이 학생자치회장은 어떤 학생을 지목하여 감사를 전하는 말로서 연설을 맺었다. 아무런 감투도 쓰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학교라는 사회를 실지로 이끌어왔다는 그 학생은 앉은 자리에서 그냥 싱긋이 웃어보였다.

나는 내가 맡았던 건축과 학생들을 떠올렸다. 평범한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도와가며 천재적인 발전을 이루는 사회가 바로 이런 것일까? 각박한 경쟁시대에 이런 상생의 현명함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독일의 교육시스템에서 나오는 것일까? 요즘 세상엔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이 복잡해지고 커졌다. 사람 이름 앞에 등수를 붙여 따로따로 경쟁시키는 시스템에서 어떻게 효율적인 분업과 협동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공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학부모 평의원으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은 독일 교육의 앞날을 걱정한다. 교육시스템에 타성이 쌓이고 순발력이 떨어져서 다시금 개혁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열을 낸다. 작금의 시스템으로는 세계화 시대에 경쟁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인적자원을 배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인적자원을 배출하기 위해, 즉 기회의 평등과 재능의 개별적인 계발이 좀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학생의 인격이 좀 더 존중받는 학교 풍토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독일 사회에선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핀란드를 모델 삼아) 꾸준히 개선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적자원이기에 앞서 그들의 유일한 인생을 값지게 살 권리가 있는 영혼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뮌헨에서 임혜지 im1@hanamana.de




글을 쓴 임혜지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10대때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 칼스루에공과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뮌헨에서 살고 있는 임씨는 프리랜서로 독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실측조사와 발굴연구를 하고 있다. 2003년에는 <프리드리히 바이브렌너 시대의 칼스루에 주택>을 독일 유명출판사에서 펴냈고, 그동안 <인터넷한겨레> 등에 써온 글을 묶어 2008년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한겨레출판)을 펴냈다. 이 글은 임씨가 자신의 블로그(www.hanamana.de/hana)에도 실었다. 임씨의 블로그에는 좀더 다양한 글과 이 글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출처가 기록돼 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