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5일 일요일

[삶의창] 늙은 아버지의 비애 / 박범신

» 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신경숙의 최근작 <엄마를 부탁해>에 흥미로운 모티브가 나온다.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외출했다가 아버지가 먼저 전철에 오르고, 그 사이 전철 문이 닫히는 바람에 뒤에 남겨진 어머니를 잃어버린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오래전의 삽화가 떠오른다.

살아생전 나들이할 때, 아버지는 보통 다듬질이 잘된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떨쳐입고 중절모까지 쓴 채 단장을 턱턱 소리 나게 짚으면서 앞장서 걷는다. 그에 비해 남편의 외출복을 손질하느라 잠을 설친 어머니는 치마를 깡똥하게 올려 묶고 보퉁이까지 이고서 종종걸음으로 아버지를 뒤쫓는다. 나란히 걷는 법은 없다. 본래 풍속이 그렇거니와, 보퉁이까지 인 어머니가 아버지의 활달한 걸음걸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이가 많이 벌어지면 아버지는 뒤쪽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이 예펜네, 왜 이렇게 꿈뜬 거여!’하고 소리치고, 어머니는 그럼 ‘아이구, 가요 가!’ 찔끔해서 불탄 북어껍질처럼 기어들어가는 형국이 된다. 언짢은 풍경이다. 아버지가 보퉁이를 어머니 대신 들었거나, 최소한 어머니의 보폭을 고려해 함께 걸었다면, 이 풍경은 보다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설날이면 제자들이 세배를 하러 온다. 어느덧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세배를 오는 경우도 많다. 초인종이 울려 현관문을 열어보면 대문을 밀치고 먼저 들어오는 것은 한결같이 아름답게 성장하고 핸드백을 날렵하게 든 여자들이다. 남자는 굼뜨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이 보통 갓난아이를 안고 기저귀가방과 과일바구니 같은 예물을 함께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관에서 인사를 나눌 때까지 남자가 다가오지 않으면 여자 쪽에서 더러 대문간에 대고 이렇게 퉁바리를 놓기도 한다. ‘아, 빨리 안 오고 뭐해요!’

풍경이 이렇게 다르다. 불과 몇십 년 이쪽저쪽이니,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자들이 짊어져 왔던 불평등구조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남은 남성우월주의가 있다면 주로 사회적 관습이지 제도가 아니다. 남자들이 가졌던 가계 계승권이나 절대적 재산 행사권 등도 사문화된 지 오래다. 바람직하고 당연한 변화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여자들의 그것에 비해 남자들의 헌신과 고절함은 별로 회자된 적이 없다는 것도 남는 문제들 중의 하나다. 전근대에서 누렸던 남자들의 권력은 다 해체됐으니 가족에 대한 임무로서, 남자들의 절대적 부양권 또한 온 가족이 나눠지려는 자세가 필요할 터인데, 부양권은 여전히 무한 강조되고 있다. 특히 가난의 사슬을 야수적으로 끊어낸 장·노년층의 아버지들을 보라. 그들은 오직 우리 사회의 온갖 그늘을 만들어낸 독불장군 고집불통의 권위적인 세대로 불린다. 그런 지적의 전부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젊은 후배들과 여자들에게 권세를 내준, 그리하여 세월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심정의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은 비애롭기 그지없다.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소외되는 가정이 불건강하다면 늙은 아버지가 ‘뒷방 늙은이’로 소외되는 가정 또한 불건강하다.

올 설엔 늙어가는 아버지도 보자. 뒷전에 물러앉아 헛기침이나 날리고 있는 아버지가 권위를 부리려고 그렇다고만 단정해선 안 된다. 어쩌면 민망해 할지 모를 그들을 따뜻이 불러 함께 차롓상 제수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회가 역할을 그들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한때 권세를 누렸지만 그들이 애당초 원해서 누렸던 권세는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이로부터 권력자로 ‘길러졌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잘못된 가부장제의 일차적 희생자인지 모른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350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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