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영원한 사랑' 나눴던 프랑스 철학자 부부


"... 그리고,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 릴 적에는 이렇게 끝나는 동화의 마지막이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효녀 심청이 사랑하는 그와 '오래오래' 그것도 '행복하게' 살았다면,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더 남아있을 터인데, 슬쩍 얼버무리며 끝내려하다니!
조금 나이가 들면서 이 동화적 관용 문구를 표현 그대로가 아닌, '이후로 같이 늙어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해하지 말고'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이야기 속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꼭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오래오래' 함께 하더라도 그 삶의 내용이 동화처럼 재미있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성인이 되어 스스로 만남과 헤어짐, 열정과 실망을 경험하다보면, 이제는 과연 '두 인간이 만나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간직하며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주변에서는 사랑보다는 이별과 환멸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오고, "지긋지긋해도 정 때문에, 자식 때문에 산다"는 (한 때는 분명 서로를 사랑했던) 윗 세대의 한탄에는 귀를 틀어 막고 싶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사랑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인간의 감정이 매순간 변한다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는 철없는 소년 소녀들이나 할 수 있는 대사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변치않는 사랑 이야기를 갈망합니다.
순 애보 영화와 드라마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을 울리고, '나에게도 저런 사랑이' 하는 꿈을 꾸게 만듭니다. 포기해버리기에는, 언젠가 '나를 채워 줄 반쪽'을 만나 외로움과 몰이해의 터널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나 뜨겁고 강렬하니까요.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고르와 그의 아내 도린
"당신의 나이 이제 82살, 여전히 나에겐 아름답고 우아하고 탐스러운 여인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58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 당신을 더욱 사랑합니다.
내 가슴 속에는 오직 나를 감싸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가 있었지요. 매번 새롭게 당신과 사랑에 빠지며 그 빈자리가 줄어들고 있네요.
가끔 밤에 나는 황량한 풍경 속에 텅빈 거리를 걷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봅니다. 당신의 영구차를 따라 걷고 있는 바로 내 모습입니다. 나는 당신이 화장되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재가 든 단지를 받아들고 싶지 않습니다.
캐스린 페리어의 노래가 들리네요.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 하네.'
그렇게, 나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옆에 잠든 당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고, 내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 둘 다, 한 쪽이 먼저 죽는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종종 말하곤 했듯이, 기적이 일어나 우리가 또 한번의 인생을 살게 된다면 그 때도 반드시 둘이 함께이기를."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발췌 Lettre a D. Histoire d’un Amour by Andre Gorz>
이 아름다운 연애편지는 저명한 정치생태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앙드레 고르(Andre Gorz, 1923~2007)가 평생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아내 도린(Dorine)에게 바친 책에 실려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유럽 최고의 예리한 지성'이라 칭찬했던 고르는, 프랑스 68혁명의 이론가였으며 생태주의의 틀을 세운 선구자,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한 언론인이었습니다.
학자로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1983년, 그는 모든 사회활동(언론인,학자, 교수로서의)에서 은퇴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와 남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젊은 시절의 고르와 도린
고르와 도린은 1947년 스위스 로잔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빈털털이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청년과 극단 배우였던 영국 처녀 도린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렸지요.
내성적이고 생각이 많은 청년이었던 고르는 활발하고 긍정적인 도린에게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합니다.  "늘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만 해온 나를 자기 긍정의 세계로 이끌어준 것은 도린이었다."
1949 년 결혼한 뒤, 도린은 고르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습니다. 고르가 회의에 빠지고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당신 삶의 목적은 글을 쓰고 철학을 하는 데 있어요"라는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르는 그녀가 '삶의 불안전성'에 대항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인생의 모든 부분을 함께 했던 두 사람에게 1973년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도린이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던 것이지요.
수술과 입원을 여러 번 거쳤으나, 도린의 몸은 약해져 갔습니다. 결국 고르는 도린과 함께 집에서 남은 삶을 보내기로 결심, 은퇴한 뒤 24년간 그녀를 간호하고 글을 쓰며 살았습니다.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제 Lettre a D. Histoire d’un Amour
아내의 죽음을 기다리며, 한번이라도 더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애쓰면서 고르가 쓴 글들이 바로 <D에게 보낸 편지-어느 사랑의 역사(학고재, 2006)>입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한 것처럼(우리 둘 다, 한 쪽이 먼저 죽는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2007년 9월 22일,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약물을 주사해 동반자살했습니다. 도린의 고통이 극에 달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함께 누워있는 머리맡에는 시신을 화장해 둘이 함께 가꾸어 온 정원에 뿌려달라는 유언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 제라드 호스트(Gerard Horst, '앙드레 고르'로 바꾸기 전의 이름)와 그의 아내 도린, 살아있을 때와 같이 죽음 앞에서도 함께 하였다.(Gerard Horst and his wife Dorine have united in death as they were united for life)"

관련 기사
http://entertainment.timesonline.co.uk/tol/arts_and_entertainment/books/book_extracts/article2651472.ece
http://www.guardian.co.uk/news/2007/nov/07/guardianobituaries.obitu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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