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쿠데타 받아들인 케네디 | ||||||||||
[오바마 시대와 한국](31)오바마를 거울 삼아 보는 한국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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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산’ 아래서 보낸 64 년 미국은 한국이 함께 가야 하는 나라이다. 무엇보다도 2만 명이 넘는 그 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중국 다음 가는 한국 상품 수입국이다.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 하면 무엇이나 최고’ 내 또래의 사람들은 ‘미국 하면 무엇이나 최고’라고 여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25일에서 며칠이 지난 무더운 여름날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을 넓은 터에 모인 동네 어른들이 “괴뢰군이 남침을 해서 서울을 점령한 뒤 남으로 밀고 내려온다”면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피란 떠날 걱정을 하던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굉음이 울리더니, ‘무스탕 비행기’라고 부르던 거무튀튀한 물체가 날아가면서 하얀 ‘삐라’를 쏟아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엔군이 곧 참전해서 ‘괴뢰군’을 무찌르겠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로는 질이 좋은 종이에 인쇄한 그 삐라들은 산에 들에 널려 있어서 아이들은 그것을 주워서 딱지치기를 하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곤 했다. ‘고마운 미국’의 가루우유 이듬해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간 우리에게 ‘고마운 미국’이 손을 내밀었다. 미군 전투기들이 무차별 폭격을 해서 기둥만 앙상하게 남은 ‘교실’에서 차디찬 마루바닥에 앉아 몽당연필 심에 침을 묻혀가면서 공부를 하던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면 먹을 것이 없어서 양지에 모여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비참한 곳에 어느 날부터 미국의 원조물자인 ‘가루우유’가 배급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성조기와 한국의 태극기가 악수하는 그림이 선명하게 찍힌 그 우유 자루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도 최대의 ‘영양 공급원’이었다. 사람들은 허기지면 허겁지겁 그 우유를 가루 채 먹고, 좀 느긋해지면 쪄서 먹기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들은 것이지만 그 우유가 ‘사료용’ 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양식‘이었다. 조금씩 이상해진 미국 우리는 정신없이 서울시청 광장을 지나서 중앙청(지금의 경복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 2백여 미터 지점까지 갔다. 앞에는 동국대 학생 수백명이 도로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경무대 입구에는 배관용 시멘트통을 쌓아놓고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납작 엎드린 채 겁에 질려서 앞을 보고 있었다. 오후 1시쯤이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뛰어’ 하는 선생님의 고함에 따라 우리는 삼일당(진명여고 강당) 옆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 고등학교 학생 열두어 명이 총을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다.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들어선 장면 정부 역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 ‘새롭고 적극적인 교섭’을 시도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으며 그의 쿠데타 동지들 가운데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는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 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21일, ‘미국의 오만· 일본의 무례에 앞서 한국의 비굴함을 먼저 반성해야’, 이재봉 기자의 기사에서). *이재봉 기자는 한국 정부가 40여년만에 공개한 ‘한일 회담 문서’와 미국 의 한국 관련 외교 문서들을 검색한 결과를 바탕으로 위의 기사를 썼다고 밝혔다. 위에 인용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의심하면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약 그때 케네디가 박정희 군대가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 없이 이동한 것을 문제 삼았다면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을 것이다. 이래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기까지 18년 5개월의 기나긴 독재가 시작된다. ‘광주’를 버리고 전두환을 택하다 1980년 5월에 미국은 또 ‘이상한 일’을 저지른다. 박정희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서울의 봄’을 군화발로 억누르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과 청년들을 체포하자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이 18일 오전에 항의시위를 벌인다. 그것이 시민항쟁으로 커지고 전두환 일파가 광주를 무장 공격하기 시작한다. 공포 속에서도 평화롭게 며칠을 보내던 시민들은 ‘미국이 곧 항공모함을 보내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국은 끝내 광주를 저버리고 전두환을 택했다. ‘인권대통령’을 자임하던 지미 카터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퇴임 뒤에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은 별개 문제이다. 카터의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이 198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전두환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가까운 친구처럼 등을 두드렸다는 사실은 이 글의 앞 부분에 쓴 바 있다. 오바마의 ‘인맥’을 찾아라? 2008년 11월 6일 오전 2시(한국시각) 버락 오바마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우리나라에서, 특히 정부와 재계에서 ‘오바마 인맥을 찾아라’가 지상과제처럼 떠올랐다. 미국의 우산 아래서 60 년 가까이나 권력과 부를 누려온 보수세력에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오바마 당선자와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미국시민권을 가진 우리나라 동포로서 오바마의 승리에 기여한 사람은 누구인지, 미국 정·재계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보좌할 ‘친한인사’는 누구인지를 알아내서 빨리 선을 대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 신문 방송 등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인맥’을 강조하면서 혹시나 나라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오바마의 옛 친구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외교 실무라인은 아예 묵묵부답이고 그나마 국제적 인맥이 있다는 국회의원 몇 명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여하여 오바마 후보자와 악수하며 찍은 사진 한 장이 한국과 미국 대통령 당선자 사이에 형성된 스킨십의 전부이다. 오바마 인맥 찾기에 몰두하기는 야당인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아무개가 그와 선이 닿는다느니, 어떤 한국 교민이 오바마 선거 캠프에서 중요한 일을 했다느니 하면서 나라 안팎 뒤지기에 나섰던 것이다. 한국에서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공천을 받으려고 인맥을 찾아서 효과를 본 것처럼 오바마 대통령에게 접근하겠다는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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