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좋은글] 게으름 예찬자들은 과연 게으를까?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나 격언들은 참 많다. 대부분 게으름을 나무라고 노동과 땀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나 격언들은 누가 지어냈을까?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일을 시키는 사람이었을까? 아무래도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1883년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발표했다.


그는 선언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직업윤리는 자본가의 논리일 뿐이며 하루 12∼13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그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임을 강조했다.


그에게 게으름은 자본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적 대항이자 정당한 권리였다.


20세기들어 게으름에 대한 예찬은 더욱 늘어났다. 산업사회가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공감대를 넓혀갔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에서 하루 4시간 정도 일하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기고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으며 행복과 선한 본성이 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는 게으름을 예찬한 사람들이 애초부터 게으름이라는 말 대신 '느림'이나 '여유'라는 말을 사용했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게으름을 예찬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느림과 여유이지 본래 의미의 게으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으름과 여유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여유는 능동적 선택에 의한 것이고 게으름은 선택을 피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다. 여유는 할 일을 하면서 충분히 쉬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할 일도 안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이다.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여유이고 후회만을 남기는 것은 게으름이다.


그러나 게으름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늘어나면서 두 단어의 구분이 흐릿해져버렸다. 결국 게으름을 예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달리 게으름에 대한 좀더 세련된 핑계거리만을 제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정작 게으름을 찬양한 사람들은 게을렀을까? 물론 아니다. 그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게으른 사람이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게으름을 찬양했던 버트런드 러셀조차 9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매일 3000 단어 이상의 글을 써낸 초인적인 인물이었다.


게으름을 예찬하거나 느림의 미학을 말하는 이들이 태생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설픈 논리로 게으름을 변명하려 들지 말고 게으름과 여유를 엄밀히 구분하라. 그때 비로소 만성 게으름 탈출을 위한 비상구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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