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그건 ‘괜찮은 사람’ 아니라 ‘호구’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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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1483
스님, 그건 ‘괜찮은 사람’ 아니라 ‘호구’ 아닌가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돌보는 대신 ‘마음 좋은 호구’ 취급받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형편없는 시대

“따져봅시다. 분노하는 ‘나’와 용서하는 ‘나’ 중에 어느 쪽의 ‘나’가 괜찮은 사람입니까?”

학생들과 함께 ‘사람책’(Human Book·사람이 책처럼 자신의 지식과 삶의 경험을 나눔)을 진행하기 위해 지리산 실상사를 찾아 도법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도법 스님은 학생들에게 어떤 ‘나’가 되고 싶은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문을 열었다. 스님의 말은 명쾌했다. 사람은 행동하는 대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분노하면 ‘나’는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 용서하면 용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지 그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하는 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길인지 그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연쇄살인범도 용서해야 ‘괜찮은’ 사람일까
학생들은 너무 당연해 보이는 스님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분노하는 ‘나’보다 용서하는 ‘나’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분노하지 않고 마냥 용서만 해도 ‘괜찮은’가? 그렇게 해도 세상은 ‘괜찮아’지는가? 그걸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가? ‘괜찮은’이란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 세상, 피해자, 가해자 등에게 수식어로 붙으며 괜찮은 것은 정말 괜찮은지를 묻게 했다.

학생들은 집요하게 스님에게 물었다. 그럼 연쇄살인범도 관용해야 하는가?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몰라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면 또 어떠한가? 용서한다고 사람이 정말 바뀌는가? 바뀌지 않아도 관용해야 하는가? 이렇게 관용하는 것은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가? 도대체 괜찮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 학생 가운데 한 명에게 이 말은 그저 ‘괜찮은 말’이 될 수 없었다. 얼마 전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묻지마 칼부림’으로 지인이 희생되는 일을 겪었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그에게 용서나 관용과 같은 ‘좋은 말’은 결코 좋지도 괜찮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 전이라면 당연한 말이라고 듣고 흘렸겠지만 말이다.

이건 다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다수는 마치 자기 주변에서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겪는 것과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모두가 트라우마적 상황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나 관용, 심지어 이해는 오히려 누군가의 고통을, 정의를 외면하는 말이었다. 과거라면 ‘좋은 말씀’ 듣고 감동하고 돌아갔겠지만, 학생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야기 안에서는 고통이 구체적일수록 인물이 살아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특히 주인공은 트라우마적 존재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은 언제나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에게 큰 고통을 초래한다. 사건이 구체적일수록 고통도 구체적이다. 트라우마적 존재는 고통을 일으킨 사건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건이 초래한 고통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건과 고통이 구체적일수록 거기서 헤어나오기는 불가능하다.

관용이 힘든 트라우마적 존재
그런 그에게 관용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된다. 게다가 그가 용서한다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관용으로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말은 마음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을 끄지 못한 그에게는 괜찮은 말이 아니라 자기가 ‘형편없는 인간’임을 계속 확인시키는 비참한 말이 된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분노에 의지해 사는 그에게는 죽으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관용과 용서는 괜찮은 말이 전혀 아니다.

도법 스님의 ‘괜찮은 사람’이란 말은 이 두 번째 지점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분노에 의지해 활활 타올라도 괜찮냐고 말이다. 스님은 이것을 화살에 비유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 누구나 마음에 분노가 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첫 번째 화살이다. 첫 번째 화살을 피할 방법은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첫 번째 화살로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불, 그 불에 자신을 계속 맡기고 태워버리는 것이 두 번째 화살이다. 이 화살은 피할 수 있고 피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괜찮은’이란 말은 그저 괜찮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정의의 말이 아니다. “분노했으니 넌 형편없는 인간이야”라고 판단하는 말이 아니다. 두 번째 화살에 맞은 채 자신이 다 타버려도 “너 괜찮겠냐?”는, ‘너’를 걱정하고 안녕하기를 바라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그 불길에 의해 내가 살아 있고, 그 불길이 내 삶을 지탱하는 듯해 이 불이 꺼지면 나도 같이 꺼져버릴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불에 나 자신을 스스로 태우고 있다. 스님은 이 실상을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니르바나(Nir-vana·열반)란 불을 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내가 두 번째 화살을 피하더라도 그 두 번째 화살이 당겨지도록 촉발한 놈은 그대로 아닌가. 내가 분노에 휩싸이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분노하게 하고 세상을 망가뜨린 ‘저놈’은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무엇보다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이다. 관용이 저놈이 자기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라면 응징하기 위해 나를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불타고 있는 나’가 아니라 ‘멀쩡하게 있는 저놈’이다.

학생들의 이어지는 질문을 들으면서 이 동시대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다. 세계 전체와 불화하더라도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뒤집혀 자신과 화해하느니 세계 전체와 불화하는 것이 더 정의로운 일이 됐다. 우리는 자기를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돌보는 일에 충실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고 슬프게도 세상의 정의를 위해 동시대에 우리가 충실하게 돌보는 것은 ‘나’가 아니라 오히려 ‘그놈’이다.

우리의 온 신경은 그놈에게 가 있다. 그놈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놈을 잡기 위해 그놈에 대해서만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에게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그놈이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여기 있는 사람이 그놈이다. 또한 여기 있는 누구나 다 그놈이기 때문에 지금은 불같이 ‘동지’로 타올랐다가도 다음 순간 서로를 그놈이라고 지목한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언제나 또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그놈에 대해 동시대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만 있을 뿐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

우발성에 대한 책임을 성찰하고 짐을 지는 것
그렇기에 이 시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관용이나 호의와 같은 선의가 배신 혹은 기만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불신과 공포다. 기만과 배신의 시대에 선의는 호구 짓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묘하게 이 시대의 자기를 돌보는 원칙을 만나게 된다. 호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자기를 돌보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대화 내내 어디선가 “스님, 그건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호구 아닌가요?”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실제로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못 견디는 것은 어디에서 호구 취급받는 것 아닌가? 물건 하나를 사러 가더라도, 가게에서도, 공공장소에서도, 관공서에서도, 학교에서도, 온라인에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바로 호구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훨씬 더 공격적이어야 한다. 참지 말고 똑 부러지게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모호함과 우발성에 대한 상호성찰이야말로 호구로 미끄러지는 지름길이다. <비극>에서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하다”는 본질적 우발성은 돌이킬 수 없도록 확실한 유죄인 자들이 자기변명의 근거로 삼아 사회 전체를 범죄자의 호구로 만드는 금기시해야 할 개념이다.

영국 소설 <타조소년들>의 끝 문장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말이야”가 말하는 우발성에 대한 책임을 성찰하며 그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인간의 성장이라는 깨달음이 전도돼버린 것이다. 우발성은 일어난 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그건 우연하고 우발적인 일’이라고 발뺌하며 국가 전체를 비겁한 자들의 호구로 만드는 개념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금지돼야 한다.

대신 확실하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말로 되받아야 한다. 모든 것은 토론의 여지 없이 분명하며 이 분명한 것에 대해 말하는 일 자체가 자신을 호구로 삼으려는 짓임을 소리 높여 저지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호구 짓을 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한다. 내가 호구 짓을 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내상을 입힌다.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도, 회사도, 단체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호구가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호구로 만들고, 호구로 취급하는 것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그놈’을 잡는 일에 다시 한번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 호구가 되지 않는 것이 자기를 돌보는 길이 된 시대의 모순이 있다. 호구가 되지 않는 자기를 돌보는 방법은 나를 호구로 취급할 수도 있는 그놈을 찾아 색출하고 응징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놈, 나의 적에게 온통 마음이 가 있다.

모든 걸 지키기 위해 적에게 마음을 빼앗기다
우리는 그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다른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마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데 이 시대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적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마음을 빼앗겼으니 현시대만큼 사악하고 통치하기 쉬운 시대가 없다. 서로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그 마음에 계속 ‘빼앗겼다’는 분노의 불만 지르면 된다. 자기를 돌보려는 자는 멈추지만, 그놈을 색출하고 적을 불태우는 데 마음을 빼앗긴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정염이 끓어올라 증발하며 증기기관처럼 가열될 뿐이다. 이 형편없는 시대가 멈추지 않는 이유다.

그러므로 스님의 이야기는 마음 좋은 호구가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비참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는 이야기다. 특히 이 시대가 서로 마음을 빼앗기며 불타오르는 시대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시대의 불을 끄는 사람들이 되자는 말이다. 비록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이것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시대의 호구가 되는 비참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에 맞서는 비극적 인물이며, 그야말로 정말이지 괜찮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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